언론의 자유 종주국으로 불리던 미국에서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뉴욕타임스(NYT) 기자들의 비밀 취재원을 밝히겠다며 기자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통화기록까지 확보하려한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뉴욕타임스 본사. ⓒ AP통신=연합뉴스
20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을 비롯한 외신보도를 종합하면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뉴욕타임스 기자 3명과 기자의 어머니, 배우자 등 친인척과 관련된 통화기록을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사태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카타르 정부로부터 받은 새 대통령 전용기의 보안문제를 다룬 뉴욕타임스 보도에서 시작됐다.
뉴욕타임스는 비밀경호국이 해당 항공기의 터키 출발과 관련해 보안 우려를 제기했다고 처음으로 단독 보도했다. 이에 해당 기사를 작성한 줄리안 바네스, 에릭 립턴, 에릭 슈미트 뉴욕타임스 기자는 대배심 출석소환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법무부는 이와함께 이 기자들이 이용하는 통신사에 친인척과 관련된 통화기록들을 제출할 것을 요구하는 추가 소환장을 발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통화기록 제출 요구 대상에 정신건강 전문가나 대형로펌 책임자와 같은 직업상 비밀유지 의무가 있는 친인척이 포함됐다는 점이다. 또한 통화기록의 범위도 문제가 된 뉴욕타임스 기사보다 훨씬 이전인 2026년 1월1일자까지 소급해 자료를 요구했다는 점도 쟁점으로 부각됐다.
뉴욕타임스 측 변호인단은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가 특정 사건의 수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뉴욕타임스 기자들의 취재원 관계 전반을 광범위하게 훑어보려는 시도임을 강력히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법무부는 모든 소환장이 미국 연방법과 내부지침을 완전히 준수해 이뤄졌으며, 국가안보와 관련된 수사가 목적일 뿐 뉴욕타임스 기자들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정부가 기자의 가족과 지인의 통화기록까지 뒤져 익명의 제보자를 색출하려는 시도는 단순한 사생활 침해 문제를 넘어 권력의 비리를 세상에 알리려는 내부고발자와 취재원을 원천적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행위라는 점에서 훨씬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현대사에서 이런 '익명의 제보자'가 권력의 몰락을 이끈 대표적 사례로 워터게이트 사건이 꼽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AFP통신=연합뉴스
워터게이트, 닉슨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워싱턴포스트의 특종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6월 새벽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재선을 돕기 위한 비밀공작반이 미국 워싱턴D.C. 워터게이트 빌딩 안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경비원에게 발각돼 체포된 것에서 시작됐다.
당시 이 사건은 단순 주거침입 절도로 보였지만, 워싱턴포스트 사회부 기자들이 침입법의 수첩에 적힌 백악관 관계자 전화번호를 실마리로 추적한 끝에 조직적 정치공작이라는 사실을 파헤쳐내면서 세상에 실체가 알려졌다.
워싱턴포스트는 닉슨 정권의 전방위적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사건의 내막을 끝까지 취재해 보도했으며, 이는 다른 언론들도 뒤따라 보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들의 취재에 도움을 준 익명의 제보자는 '딥 스로트'로 불렸으며, 신문의 취재가 막힐 때마다 결정적 제보를 계속 보내왔다. 취재 기자들은 그의 정체에 대해 끝까지 침묵했다.
이 보도는 1974년 미국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의 자진 사임을 이끌어냈다. 취재를 맡았던 밥 우드워드 기자와 칼 번스타인 기자는 퓰리쳐상을 수상했으며, 워싱턴포스트는 세계적 언론으로 도약했다. 이 사건은 '취재원 보호'가 탐사보도 저널리즘의 핵심 원칙으로 자리 잡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뉴욕타임스의 '펜타곤 페이퍼' 사건, 언론자유의 이정표
펜타곤페이퍼 보도도 미국 언론 자유의 금자탑으로 일컬어진다. 펜타곤페이퍼는 1945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 개입과정을 담은 7천 쪽 분량의 1급 기밀문서로, 미국 국방부 소속 분석가 대니얼 엘즈버그가 이를 뉴욕타임스에 넘겼다.
뉴욕타임스는 1971년 6월 이 문서를 인용해 미국이 베트남전 확대에 명분으로 삼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후속보도를 막기 위해 법원에 보도금지 명령을 요청하고 뉴욕타임스를 간첩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하지만 미국 연방대법원은 정부의 사전검열 시도로 이를 규정하고 뉴욕타임스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은 이후 미국의 언론자유를 크게 신장시킨 이정표로 평가받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펜타곤 페이퍼 사건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트럼프 행정부의 언론압박이 뉴욕타임스에 그치지 않고 주요 언론 전반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3월 이란관련 군사작전과 관련한 보도를 한 월스트리트저널를 상대로 법적 조치를 취했다가 철회한 바 있다. 또한 워싱턴포스트를 향해서도 국가안보 관련해 민감한 내용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소환장을 제출했다가 철회하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취재원 색출을 위해 기자 가족의 사생활까지 파고든 이번 뉴욕타임스 사태는 '언론 자유 종주국'이라는 미국의 오랜 위상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