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의 최고경영자(CEO) 인사 공식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처럼 내부 출신과 외부 영입 여부가 기준이 아니라 계열사가 해결해야 할 과제에 맞춰 대표를 배치하는 방식이다. 특히 인공지능 전환(AX)이 필요한 계열사에 AI(인공지능)·데이터 전문가를 배치하면서 CEO의 역할이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
6일 롯데그룹의 최근 인사를 종합하면 CEO 인사의 기준이 '출신'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옮겨가고 있다. 실적 부진 장기화와 사업 재편이 이어지면서 내부와 외부를 가리지 않고 계열사가 필요로 하는 역량을 갖춘 인재를 전면에 배치하는 '미션형 인사'가 자리 잡는 것으로 분석된다.
롯데그룹은 최근 AI·데이터 역량을 갖춘 인재를 전면에 배치하며 AX 중심의 인사 기조를 강화하고 있다. ⓒ롯데지주
◆신동빈 ‘AX 경영’ 맞춰 대표이사도 ‘디지털 전문가’ 배치 속도
특히 최근에는 AX가 그룹의 핵심 경영 과제로 떠오르면서 AI와 데이터, 플랫폼 경쟁력을 갖춘 인재를 CEO로 전진 배치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올해 AX를 그룹 최우선 전략으로 제시한 이후 AI·디지털 전환이 필요한 계열사를 중심으로 관련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잇달아 발탁하고 있다.
올해 수시 인사는 AX를 실제 사업으로 구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재를 전면에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가장 먼저 코리아세븐은 지난 3월 전략과 IT 역량을 갖춘 김대일 대표를 발탁했다. 김 대표는 AT커니와 베인앤드컴퍼니를 거쳐 네이버 라인 글로벌 사업과 핀테크 기업 어센드머니에서 사업을 이끌었고, 최근까지 SPC그룹 IT·마케팅 솔루션 계열사인 섹타나인 대표를 지냈다. 김 대표에게는 편의점의 본원 경쟁력을 회복하는 동시에 디지털 혁신을 가속화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같은 달 롯데멤버스도 그룹 AI·DT 혁신을 총괄했던 박종남 대표를 발탁했다. 박 대표는 롯데이노베이트 글로벌부문장과 전략기획부문장, 연구개발(R&D)센터장을 거쳐 롯데지주 AI·DT 혁신팀장을 맡으며 그룹 전반의 AI 역량 강화를 이끌었다. 박 대표에게는 그룹 통합 멤버십 플랫폼 고도화와 데이터 비즈니스 확대, 계열사 간 데이터 연계라는 AX 핵심 과제가 맡겨졌다.
이러한 흐름은 지난달 이뤄진 롯데하이마트 대표 인사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롯데그룹은 구글과 맥킨지앤드컴퍼니, 야놀자를 거친 김종윤 대표를 선임했다. 김 대표는 야놀자 최고전략책임자(CSO)와 최고사업책임자(CBO), 야놀자클라우드 CEO를 맡아 AI·데이터 기반 운영체계와 클라우드 SaaS 사업 모델 구축을 주도한 인물이다. 김 대표에게는 AI 기반 유통 혁신과 고객 중심의 사업 모델 전환, 신규 성장 동력 발굴이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출신보다 '과제 해결 능력'에 맞춘 인사
롯데그룹의 CEO 인사 기준은 최근 몇 년 사이 ‘출신’에서 ‘역량’ 중심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내부 출신 ‘롯데맨’을 중용하는 순혈주의가 원칙이었다면, 외부 전문가 영입을 거쳐 최근에는 계열사가 해결해야 할 과제에 맞는 인재를 배치하는 '미션형 인사'가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 롯데그룹은 내부에서 성장한 이른바 '롯데맨'을 중심으로 계열사 대표를 선임하며 조직 안정과 내부 경험을 중시하는 인사 기조를 유지했다.
변화의 시작은 2021년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변화와 혁신을 주도할 핵심 인재 확보'를 내세우며 그룹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 출신 부회장인 김상현 전 DFI리테일 대표를 유통군 총괄대표로 영입했다. 호텔군 총괄대표에는 커니 출신 안세진 대표를, 롯데백화점 대표에는 신세계 출신 정준호 대표를 발탁하는 등 순혈주의에서 벗어나 외부 전문경영인을 전면에 배치했다.
당시 롯데그룹은 기존 BU(비즈니스유닛) 체제를 HQ(헤드쿼터) 체제로 개편하며 사업군별 전문성과 실행력을 강화하는 조직 개편도 함께 단행했다. 그 뒤 외부 전문가 영입은 유통 사업의 체질 개선과 사업 혁신을 위한 롯데그룹 인사의 새로운 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인사 기조는 지난해 말 다시 한 단계 진화했다. 롯데그룹은 유통군 HQ를 폐지하고 계열사 책임경영 체제를 강화하면서 CEO 선임 기준도 '역할'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오카도와 타임빌라스 등 대형 프로젝트를 안정적으로 이어가고 본업 경쟁력을 회복해야 하는 계열사에는 조직 이해도가 높은 내부 리더를 전면에 배치했고, 올해 들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AX를 그룹 최우선 과제로 제시한 이후에는 AI와 데이터, 플랫폼 경쟁력이 필요한 계열사에 관련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잇달아 발탁하고 있다.
◆AX 전문가를 뽑는다고 AX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각에서는 미션형 CEO를 전면에 배치하는 것만으로는 AX 전환의 성패를 좌우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나온다. AI와 데이터 역량을 갖춘 전문가를 계열사 대표에 앉히는 것과 실제 사업 혁신을 이뤄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AX는 개별 CEO의 역량뿐 아니라 그룹 차원의 데이터 인프라와 투자, 계열사 간 협업 체계가 함께 뒷받침돼야 성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롯데그룹도 AX를 특정 CEO 개인의 과제로만 보지 않고 그룹 전체가 함께 추진해야 하는 혁신 과제로 접근하고 있다. 신 회장은 최근 계열사 CEO 50여 명을 대상으로 AI 교육을 직접 주재하며 "AX는 성장이 아니라 생존이 걸린 과제"라고 강조하고, 경영진이 AI 전략과 실행 방안을 먼저 체득해 조직 전체의 AX를 이끄는 체계 구축에 나섰다.
그 뒤 롯데그룹은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AI 에이전트 실무 교육을 확대하고, 생성형 AI를 전사 업무 환경에 도입해 보고서 작성과 데이터 분석, 정보 조사 등 반복 업무를 AI가 수행하는 업무 체계 구축에도 나서고 있다.
AX는 이미 계열사 사업 현장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롯데온은 고객의 취향과 상황을 분석해 맞춤형 상품을 추천하는 '패션AI'를 도입했고, 롯데마트는 딥러닝 기반 비파괴 당도선별 시스템으로 신선식품 품질 관리를 고도화했다. 롯데백화점은 외국인 고객을 위한 AI 실시간 통역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롯데웰푸드와 롯데칠성음료는 챗GPT와 자사몰을 연동해 맞춤형 제품 추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롯데멤버스 역시 챗GPT와 엘포인트를 연결해 별도 애플리케이션 설치 없이 멤버십 혜택과 사용처, 이벤트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고도화했다.
AI 활용 범위는 생성형 AI를 넘어 피지컬 AI로도 확대되고 있다. 롯데이노베이트는 자체 AI 플랫폼 '아이멤버(Aimember)'를 기반으로 휴머노이드 로봇 '로이(ROI)'를 개발해 세븐일레븐 미래형 매장과 롯데월드타워 스카이런 행사 등에 투입하며 실제 현장 적용 가능성을 검증하고 있다. 검증 이후에는 유통·물류·서비스 현장 전반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해 AI를 그룹의 공통 인프라로 정착시켜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