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인스타그램 숏폼을 넘기다 우연히 ‘GTX 출근러 일상’이라는 영상을 봤다. 화면 속 사람들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한강변의 러닝크루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2025년 4월6일 GTX 서울역에서 한 승객이 행선지를 향해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안전을 위해 뛰지 마세요”라는 표지판 앞에서도 사람들은 달린다. 뛰는 이유는 단 하나,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였다. '초고속 열차'를 타기 위해 지하에서 다시 뛰어야 하는 풍경은 뭔가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A 서울역에는 대합실과 승강장을 연결하는 고속 엘리베이터가 2대뿐이다. 다른 주요 역에 고속 엘리베이터가 여러 대 설치된 것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승강장은 역에 따라 지하 40~60m까지 내려간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긴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여러 차례 올라야 한다. 일부 시민들이 이곳을 헬스장의 ‘천국의 계단’에 빗대는 이유다.
GTX는 출퇴근 혼잡 시간대를 피하면 ‘신세계’다. 좌석은 쾌적하고 열차는 빠르다. ‘돈을 내고 시간을 샀다’는 말이 어울리는 교통수단이다.
교통 인프라의 진짜 성능은 한산한 낮이 아니라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피크 시간에 드러난다. 매일 아침 GTX 승강장으로 향하는 길이 달리기 경주처럼 변한다면, 그 편리함을 모두가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GTX 정차역은 수도권 부동산 시장에서 큰 호재로 꼽혀왔다. 서울 집값을 감당하기 어려워 외곽으로 이동한 사람들에게 GTX는 서울로 빠르게 출퇴근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겼다. 신도시 아파트 입주민들은 분양 과정에서 수천만 원의 교통 분담금을 부담하기도 했다.
GTX-A 노선은 기본운임 3200원에 이동거리에 따른 추가운임이 붙는 거리비례 방식으로 운영된다. 구간에 따라 편도 요금이 4000원을 넘는다.
매일 GTX로 출근하는 유아무개(43)씨는 “출근길에 다들 뛰어가니까 나도 모르게 뛰게 된다”며 “천천히 걸어가거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사람이 가득 차서 3~4대를 보내고 나면 굳이 비싼 돈을 내고 GTX를 타는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이처럼 뛸 수 있는 비장애인 청장년층도 출근길 엘리베이터를 잡기 위해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전동휠체어 이용자나 시각장애인, 유아차 이용자는 어떨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소속회원들이 8월3일 혜화역 4호선 플랫폼에서 지하철 탑승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퇴근길 서울 지하철 3호선 을지로3가역에서 본 장면이 떠오른다.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 사이에서 전동휠체어 이용자가 열차에 오르지 못하고 3~4대를 보내고 있었다. 승강장에 남은 사람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우리는 수년째 지하철역에서 이동권을 요구하는 장애인 단체와 출근길 불편을 호소하는 비장애인들의 갈등을 보고 있다. “왜 하필 사람 많고 바쁜 출근길이냐”는 항의와 “이동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가 맞부딪힌다. 이러한 갈등 조차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열차가 특정 역을 무정차 통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누군가의 이동을 보장하려면 다른 누군가의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구조라면,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에 있다. 이동할 공간과 시설이 충분하지 않으니 서로가 서로의 이동을 방해하는 사람이 된다. GTX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될 수 있다.
2025년 5월21일 경기도 용인시 GTX-A 구성역에서 열린 '2025 READY Korea 2차 훈련'에서 구급대원들이 천장 붕괴 등으로 발생한 사상자를 구조하고 있다. 이번 훈련은 집중호우로 역사 내에 침수 및 화재 사고가 나 다수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을 가정해 이뤄졌다. ⓒ연합뉴스
깊은 지하 승강장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에서 뛰는 것은 위험의 궤가 다르다. 한 누리꾼은 “에스컬레이터에서 뛰다가 넘어져 다치는 모습을 많이 봤다”며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누군가는 반문할 것이다. 기존 지하철이나 버스보다 훨씬 빨라졌고 편리해졌는데, 출퇴근 시간대의 불편까지 사회 문제로 확대하는 것은 과하지 않느냐고. 조금 일찍 나오면 되는 것 아니냐고.
이 모든 문제를 개인의 부지런함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승객들이 기존 대중교통보다 비싼 요금을 내는 이유는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는 기대도 함께 포함돼 있을 것이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역에 엘리베이터 2대를 설치해놓고 비장애인 승객에게는 뛰기를, 교통약자에게는 기다림을 요구한다면 결국 부족한 인프라의 비용을 승객에게 떠넘기는 셈이다.
2026년 5월21일 서울 강남구 GTX-A 삼성역 공사현장에 안전제일 안내판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수도권 30분 생활권’을 가능하게 한 교통 혁신은 열차가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더 빨리 도착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누구나 안전하게 탈 수 있는 교통수단을 만드는 일이다. 아침마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승강장과 출구를 향해 내달리는 ‘GTX 러너’들이 보이지 않는 날, 어쩌면 그날이야말로 GTX가 교통 혁신에 한 걸음 가까워진 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