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뒤 두 번째로 국회를 찾아 2027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했다. 지난해 시정연설을 보이콧했던 국민의힘은 올해 본회의장에 들어왔지만 연설 도중 야유를 보냈고,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박수갈채로 화답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30여 년이 흘렀지만, 역대 대통령들이 국회를 찾을 때마다 여야의 상반된 태도가 되풀이됐다. 한쪽에서는 넘치는 환대가, 다른 한쪽에서는 냉대를 넘어 야유와 조롱이 쏟아졌다.
한국 정치의 진영 대립이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여야 의원들이 '기본적 금도'는 지켜야 하지 않는지, 묻게 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2일 국회에서 2027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는 도중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이 손팻말을 들고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4일 정치권 움직임을 종합하면, 2일 이뤄진 이 대통령의 2027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둘러싼 논쟁의 여진이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당시 국민의힘 의원들은 국회 본관 로텐더홀 계단에 미리 집결해 있다가 이 대통령이 도착하자 미래대응기금 신설과 조희대 대법원장 탄핵 추진 등에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항의했다. 이 대통령이 시정 연설에서 국가채무에 관해 설명하는 도중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재판이나 재개하라"와 같은 고성을 지르기도 했다.
연설이 끝난 뒤에도 여야의 태도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민주당 의원들은 기립박수를 보낸 데 이어 대통령과 악수하기 위해 줄을 섰고, 함께 셀카를 찍기도 했다. 반면 국민의힘 의원들은 연설이 끝나자마자 박수도, 악수도 없이 본회의장을 떠났다. 조경태 의원만이 국민의힘 소속으로는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며 이 대통령과 악수하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이후 보수 진영 일각에서 비판이 제기되자 조 의원은 연합뉴스와 나눈 통화에서 "여야를 떠나 국가 원수에 당연히 예우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5선 중진인 권영세 국민의힘 의원은 3일 채널A 라디오쇼 '정치시그널'에 출연해 다른 경우에 별다른 예우를 갖추지 않던 사람이 상대 당 대통령에게는 깍듯하게 예우를 갖추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행동이라는 취지로 비난했다.
사실 대통령의 국회 연설을 둘러싼 여야의 볼썽사나운 모습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6년 7월 제15대 국회 개원연설에 나섰을 때도 여당 의원들은 연설 도중 14차례 박수를 보냈다. 야당 의원들도 대통령의 입장과 퇴장 때는 박수를 쳤다. 다만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박준규 최고고문은 거의 홀로 김 대통령이 입장할 때 자리에 앉아 '무언의 항의'를 표시했다.
김대중 대통령(오른쪽)이 2000년 6월5일 제16대 국회 개원연설을 위해 국회를 방문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악수하고 있다.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
반면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제16대 국회 개원연설에서는 여야 의원들이 모두 기립박수로 대통령을 맞았다. 약 20분간 이어진 연설에서 18차례 박수가 나왔고, 특히 김 대통령이 "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존중해 중요 국사를 대화 속에 추진하도록 성의와 노력을 다하겠다는 것을 굳게 약속한다"고 하자 가장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서도 연설 참석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를 고려해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풍경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출범 이후 첫 예산안 시정연설에서는 한나라당 의원 상당수가 대통령이 입장할 때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약 30분간 이어진 연설에서도 단 한 차례의 박수조차 나오지 않았다. 전임 김대중 대통령에 견줘 사실상 '대통령 대우'를 하지 않은 셈이다.
민주당 쪽에게 '반격'의 기회가 돌아왔다. 2008년 10월 이명박 대통령의 시정연설에서 야당 의원들은 대통령이 입장할 때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박수는 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연설 도중 플래카드를 펼쳐 보인 뒤 집단 퇴장했다. 5년 전 뿌린 씨앗은 그렇게 돌아왔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일상'이 됐다. 2013년 11월 박 대통령의 첫 예산안 시정연설 당시 야당 의원들은 대체로 박수 없이 대통령을 맞았고, 일부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1월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시정연설을 마친 뒤, 근조 리본을 달고 항의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가 탄핵으로 쫓겨난 때문일까,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의원들은 적대감까지 드러냈다. 2017년 11월 문재인 대통령의 시정연설에서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검은색 옷에 근조 리본을 달고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섰고, 연설 도중에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현수막을 펼쳐 보였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연설을 마친 뒤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먼저 다가가 악수를 청했고, 결국 야당 의원들도 이에 응했다.
윤석열 정부에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아예 제1야당이 대통령의 시정연설 참석을 거부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10월2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는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좌석이 텅 비어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검찰의 대장동 수사를 정치보복으로 규정하고 이날 윤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보이콧했다. ⓒ연합뉴스
2022년 10월 더불어민주당은 윤 대통령의 예산안 시정연설을 앞두고 전면 보이콧을 선언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예산안 시정연설에 제1야당이 본회의장 입장 자체를 거부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었다.
물론 '화해의 시도'도 있었다. 2023년 10월 윤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앞두고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본회의장 내 손팻말 부착과 고성·야유를 자제하기로 하는 이른바 '신사협정'을 체결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국회 밖에서 시위를 벌이기는 했지만 본회의장에서는 연설을 끝까지 들었고, 윤 대통령과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표도 악수를 나눴다.
화해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이듬해인 2024년 윤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고, 한덕수 당시 국무총리가 연설문을 대독했다. 정권이 바뀐 지난해에는 국민의힘이 이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전면 보이콧했다. 여야의 위치가 다시 뒤바뀌었을 뿐, 상대 진영 대통령을 향한 대립과 반목은 되풀이됐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30여 년이 흘렀지만 대통령의 국회 연설을 둘러싼 갈등은 이제 야유와 보이콧을 넘어, 악수를 나눈 동료 의원을 비난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극단적 진영 대립으로 정치적 금도마저 무너지지 않았는가 돌아보게 된다.
정치권에서 흔히 말하는 '금도'는 영어식 표현의 '레드라인'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넘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선을 뜻한다.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고 정부를 강하게 견제하는 것은 야당의 당연한 책무지만,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까지 거부하는 것까지 합리화될까.
야당은 선거에서 패배했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위축된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극단적 태도는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음을 뜻한다. 패배를 인정하고 절치부심해 다음에 집권하면 된다. 그게 민주주의다. 그리고 유권자들이 진영으로 갈라져 있을 때 이를 통합하는 것은 정치인의 임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