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브라질에서도 끝은 같았다. 조별리그 탈락, 홍명보 감독의 사퇴였다.
12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 감독이라는 이름표만 갈아 끼운다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시스템이 그대로라면 결과는 언제나 같을 뿐이다.
홍명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29일(한국시간) 대표팀의 월드컵 베이스캠프였던 멕시코 사포판 치바스 바예 베르데 훈련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표팀 감독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2024년 7월 논란 속에서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지 약 2년 만이다. 홍 감독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이어 두 차례나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최초의 감독이라는 불명예 기록을 남기게 됐다.
홍명보 "책임은 감독에게 있다"
이날 홍 감독은 2분간 입장문을 낭독한 뒤 취재진의 질문을 받지 않았다. 이어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참패에 대한 구체적인 원인 분석도, 전술적 실패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책임은 감독에게 있다"는 말만 남긴 채 소통 없는 퇴장을 선택했다.
홍명보 감독은 2년 전 "저는 저를 버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축구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다며 마지막 '봉사의 길'을 선택했다. K-리그 사령탑 자리를 내려놓고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당시의 결연한 표정을 이번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이번 사퇴 기자회견에서 홀가분한 태도를 보이는 듯 했다. 본인은 홀가분했을지 몰라도 지난 4년 간 대회를 위해 달려온 선수들과 이들을 응원한 축구 팬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번 북중미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조별리그 A조에서 1승2패(승점 3점)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1차전에서 체코를 2대 1로 꺾으며 산뜻하게 출발했지만, 2차전에서 개최국 멕시코에 0대 1로 패했다. 이어 비기기만 해도 조 3위 와일드카드를 통해 32강 진출이 가능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경기에서도 0대 1 충격패를 당했다. 이강인은 경기 종료 후 주먹으로 그라운드를 내리치며 끝내 받아들이기 힘든 패배에 대한 절망감을 드러냈다.
뛰는 선수들에게도, 보는 국민들에게도 '충격'이었던 경기
남아공전 이후에는 '선수단에 집단 식중독이 발생한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부터 '고의로 진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로 대표팀의 경기력은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이었다.
특히 이번 대표팀은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 등 이른바 '황금 세대'로 구성되며 역대 최고 성적에 대한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쓰리백에 의존한 단조로운 전술과 부족한 조직력은 결국 결과로 드러났다. 선수들은 어디를 향해 뛰어야 할 지조차 알 수 없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약속된 전술과 움직임이 부족했던 경기에서 선수들은 각자가 가진 능력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48개국 체제로 확대된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조 3위 팀 간 와일드카드 경쟁 끝에 밀려났고, 최종 34위에 머물며 상위 32개 팀이 겨루는 토너먼트 무대조차 밟지 못했다. 이는 한국 축구 역사상 44년 만에 나온 월드컵 역대 최저 순위라는 뼈아픈 기록으로 남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의 주역이자 대표팀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던 홍명보였다. 하지만 선수 시절 보여준 리더십이 감독 자리에서도 같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쿠팡플레이 다큐멘터리 속 홍 감독은 경기 전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FIGHT 단어 알지? 싸워. 오늘 경기장 나와서 싸워. 바보같은 행동을 해서 퇴장을 받는다거나 그거는 절대 안 돼. 하지만 순간 순간 순간마다 싸워. 나는 오늘 그거 여러분 볼 거야"
대표팀이 부족했던 것은 투지가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싸우는 정신보다 경기를 지배할 전술과 조직력이었다. 결국 '싸워라'라는 주문은 해법이 되지 못했고, 시대 변화에 뒤처진 전술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홍명보·정몽규 나가도 문제의 시스템은 남아 있다
홍 감독의 사퇴 전 이미 사퇴 의사를 밝힌 인물도 있다. 4선에 성공하며 13년 동안 대한축구협회를 이끌어온 정몽규 회장이다. 정 회장은 2026 북중미 월드컵 이후 물러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홍명보 나가", "정몽규 퇴진"만으로 모든 책임이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 축구가 바뀌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감독 교체가 아니라 실패를 반복하게 만드는 구조의 변화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축구협회는 감독을 바꾸는 데는 익숙했지만, 감독을 선임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결국 바뀐 것은 사람이었고, 바뀌지 않은 것은 시스템이었다.
홍명보 감독 선임 과정 역시 시작부터 국민적 신뢰를 얻지 못했다. 감독 선임 절차에 참여했던 박주호 전력강화위원은 감독 선임 발표 직전까지 최종 결정을 알지 못했다며 협회의 선임 과정을 비판하며 내부고발자가 됐다.
문제는 단순히 이번의 선임 과정이 아니었다. 감독을 고르는 기준, 대표팀이 추구해야 할 축구 철학, 의사결정 과정 어디에서도 일관된 원칙을 찾기 어려웠다. 그때마다 '인맥 축구', ‘밀실 선임’이라는 비판이 반복됐다.
어떤 때는 해외 명장을 찾겠다고 했고, 또 어떤 때는 국내 지도자가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상황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면서 대표팀의 장기적인 방향성 역시 흔들렸다.
전술과 선수 운용, 팀의 색깔은 계속 바뀌었고 대표팀은 매번 새로운 출발을 해야 했다. 장기적인 계획이 부족했던 탓에 특정 선수들의 능력에 기대는 '해줘' 축구라는 비판도 받아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축구협회가 스스로 만든 절차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력강화위원회 등 여러 기구를 운영했지만 최종 결정 과정에서는 위원회의 권한이 축소되거나 논의 결과가 뒤집히는 일이 반복됐다.
클린스만 감독 경질 이후 이어진 홍명보 감독 선임 과정 역시 같은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시스템보다 특정 인물의 판단이 우선한다는 인식을 지우지 못했다.
성적이 좋지 않을 때마다 감독은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하지만 감독을 선임하고 방향을 결정한 협회와 의사결정권자에게는 같은 수준의 책임이 묻지 않았다.
축구협회는 민간단체지만 국민 세금과 체육진흥기금 등 공적 재원이 투입되는 조직이다. 국민의 돈이 들어가는 만큼 감독 선임과 주요 의사결정 과정 역시 투명성과 책임성을 갖춰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욕망의 카르텔, 뿌리부터 뜯어 고쳐야"
국민적 분노는 일상 속에서도 드러났다. 한 편의점 문 앞에는 '홍명보 출입금지'라는 문구가 붙을 정도였다.
'공놀이' 하나에 전 국민이 울고 웃고 분노하는 이유는 축구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2002년 4강 신화처럼 모두가 함께 경험한 기억과 감정을 품은 우리만의 역사이자 이야기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27년 동안 축구 현장을 지켜본 박문성 축구 해설위원 역시 한국 축구를 향한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남아공 월드컵 당시 경기를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며 "다 몇 명의 축구야. 그냥 그들의 것이야"라고 말하며 축구가 일부의 인사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냈다.
박 위원은 홍명보 감독의 사퇴 과정에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29일 CBS 라디오 '박성태의 뉴스쇼'에 출연해 "억지로 사과하는 느낌"이라며 책임을 대하는 태도를 지적했다. 이어 대한축구협회를 향해 "욕망의 카르텔"이라고 지적하며 "뿌리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위원이 지적한 문제의 핵심은 특정 인물의 거취가 아니었다. 그는 축구협회를 두고 "경쟁하지 않는 조직", "고여 있는 조직"이라고 비판했다. 축구협회장 선거 역시 "200명 정도의 선거인단을 꾸려서 하는 체육관 선거"라며 새로운 인물이 도전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앞서 박 위원은 2024년 9월 24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대한축구협회 현안 질의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문제의 본질은 한 사람의 사퇴가 아니라 반복되는 구조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과거 대표팀의 캡틴이었던 박지성 JTBC 해설위원은 28일(한국시각) 미국 애틀랜타 스타디움에서 열린 콩고민주공화국과 우즈베키스탄전 중계를 마친 뒤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결국 어떻게 월드컵을 준비하고, 어떻게 한국 축구의 발전을 해나가야 하는지 지난 10년 동안 배웠는데도 또 까먹고 똑같은 일을 했다. 참으로 안타깝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미래를 꿈꾸고, 그리고 그 미래를 위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라도 나아가는 그런 우리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결국 한국 축구가 넘어야 할 상대는 특정 감독 한 명이 아니다. 반복되는 실패를 만들어낸 구조와 시스템이다. 사람만 바꾸는 방식으로 끝난다면 한국 축구는 또 같은 실패 앞에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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