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땡볕 아래, 공사장 한쪽에 대형 냉장고만 한 금속 상자가 놓여 있다. 에어컨도, 휴게실도 아닌 이 낯선 장비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인간 냉장고’다.
일본 산업용품 업체 트러스코 나카야마(TRUSCO Nakayama Corporation)가 개발한 개인용 냉각 부스 ‘도히에몬 박스(ど冷えもんBOX)’의 모습이다. ⓒ트러스코 나카야마 홈페이지
높이 약 2m, 무게 약 300㎏, 성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이 금속 상자는 냉장 자판기 제조사가 만든 개인용 냉각 부스 ‘도히에몬 박스’다. 이름부터 ‘엄청 차갑게 해주는 물건’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작업자가 땀에 젖은 몸으로 부스 안에 들어가면 내부 온도는 15도까지 내려가고, 목과 등 뒤로는 5도의 냉기가 직접 분사된다. 20분 뒤에는 자동으로 멈춘다. 제조사에 따르면 단 5분 만에 체온을 낮춰 열사병 예방 효과를 낼 수 있다. 가격은 150만 엔(약 1400만 원)에 달한다.
에어컨 대신 ‘인간 냉장고’, 일본 기업들이 노동자의 체온을 낮추는 이유
비싼 가격에도 이 ‘인간 냉장고’는 일본 산업 현장에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22일 도카이TV 등 일본 현지 보도에 따르면 정식 출시 이후 약 130개 기업이 대형 제조 공장과 물류센터, 건설 현장 등에 이 장비를 도입했다. 공장 전체를 냉방하기 어려운 공간에서 노동자의 몸을 직접 식히는 방식이다.
활용 범위는 산업 현장에만 머물지 않는다. 군마현 마에바시시청 로비 등 공공기관의 폭염 쉼터와 야외 행사장 응급 냉각 장비로도 사용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배경에는 폭염을 산업재해 문제로 바라보는 변화가 있다. 일본 정부는 2025년 6월부터 개정 산업안전보건규칙을 시행하면서 사업주의 열사병 예방 의무를 강화했다. 열사병 의심자가 발생했을 때 보고 체계와 작업 중지, 응급조치 절차를 사전에 마련하도록 했고,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사업주는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 ‘인간 냉장고’는 노동자의 안전을 위한 장비인 동시에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한 안전 투자이기도 하다.
사람의 열을 식히는 기술, 노동자를 쉬게 하는 해법일까
대구에 폭염경보가 발효 중인 7월15일 대구 동구 삼성자동차해체재활용산업 폐차장에서 동부소방서 소속 119구조대원이 교통사고 현장 대응능력 향상을 위한 특별구조훈련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인간 냉장고’가 폭염 노동의 근본적인 해법인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남는다.
뜨거운 야외에서 장시간 일한 노동자가 갑자기 5도의 냉기에 노출될 경우 급격한 혈관 수축으로 심혈관계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또한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공간인 만큼 위생 관리 역시 따라붙는다. 땀에 젖은 노동자가 반복적으로 드나드는 환경에서 소독과 청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폭염 대응 장비가 또 다른 건강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5분 동안 몸을 식혔으니 다시 일하라는 식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 폭염 속 노동 시간을 줄이고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는 대신, 노동을 계속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인간 냉장고’는 안전장비가 아니라 또 다른 압박 수단이 될 수 있다.
접근성 문제도 있다. 1400만 원에 달하는 장비를 마련할 수 있는 곳은 대기업이나 대형 공사장에 한정될 가능성이 크다. 정작 폭염에 가장 취약한 소규모 하도급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닿기 어려운 기술일 수 있다.
덜 일하게 할 것인가, 덜 덥게 일하게 할 것인가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가 7월14일 대전시청 앞에서 폭염 속 노동자 건강권 보호를 촉구하는 '2026 폭염감시단' 발족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기후변화가 심화하면서 세계 각국은 폭염에 적응하기 위한 과거와는 다른 노동 기준을 만들고 있다.
한국 역시 폭염 속 노동자의 안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바꾸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온열질환 예방을 위해 물, 그늘, 휴식 등 ‘폭염안전 5대 기본수칙’ 준수를 사업주에게 요구하고 있다. 체감온도 33도 이상일 경우 2시간마다 20분 이상 휴식을 보장하고, 보냉장구 지급과 온열질환 발생 시 작업 중지 및 응급조치도 의무화했다. 올해부터는 폭염중대경보 도입으로 작업시간 조정과 옥외 작업 중단 권고도 강화됐다.
스페인과 그리스 등 유럽에서는 폭염 시간대 야외 노동을 제한하는 방향을 택했다. 미국은 물과 그늘, 휴식을 노동자의 권리로 보장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본은 개인 냉각 부스와 냉각 조끼 같은 기술을 활용해 노동자의 체온을 직접 관리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폭염이 더 이상 특별한 재난이 아니라 일상이 된 시대, 더 뜨거워지는 지구에서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 노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눈앞에 놓였다. ‘인간 냉장고’는 그 질문에 대한 일본식 답변이지만,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어떤 노동 환경을 선택할 것인지 되묻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