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과 인공지능(AI)의 두 번째 만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씁쓸하단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아무도 인간이 AI와 싸울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이세돌이 단 몇 수만에 “인간이 이길 수 없다”며 장난스럽게 돌을 던져도, 10년 전만큼 충격은 아니었다. 인간은 이제 AI에 전혀 다른 감상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9일 오후 1시, 이세돌은 2016년 알파고에 1대4로 패배했던 무대에 다시 섰다. 에이전틱 AI의 발전을 홍보하기 위해 스타트업 인핸스가 앤트로픽,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원을 받아 마련한 행사다. 이 자리에서 새로운 AI는 이세돌의 명령을 수행해 즉석에서 바둑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교육용 프로그램이었지만 몇 번 수를 두어본 이세돌은 “이길 자신이 없다”고 했다.
9일 오후 1시, 이세돌은 2016년 알파고에 1대4로 패배했던 무대에 다시 섰다. ⓒ연합뉴스
이 말은 “질 자신이 없다”는 그의 대표적 어록을 완전히 뒤집은 말이다. 적어도 바둑이라는 세계에서는 ‘인간 중 가장 뛰어난 인간’이었던 이세돌이, AI는 인간이 싸울 대상이 아니라고 결론지은 셈이다.
며칠 전 서울대학교 강의에서 이세돌은 “AI는 신이다”라고 말했다. ‘신산’ 이창호 같은 전설의 인물에게 주어졌던 ‘신’의 칭호를 AI에 넘겨준 것이다. AI가 신이라면, 신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전의를 가질 수 있겠나.
이세돌만큼 AI의 트라우마를 강하게 겪고 있는 인간도 없을 것이다. 지난해 나온 그의 책 ‘이세돌, 인생의 수읽기’는 AI 시대 트라우마의 첫 번째 생존자로서 이세돌이 겪고 있는 혼란의 기록으로 읽힌다.
책에서 이세돌은 “바둑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예술”이라면서도 “인공지능이 바둑은 결국 도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우리는 예술성을 부정당했다”라고 쓴다. “바둑을 둘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 있다면 바로 ‘상식’과 ‘효율’”이라면서도 “인공지능의 바둑은 효율이 중요해졌고 사람의 바둑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고도 말한다.
사람이 따라갈 수 없다는 감각은 인간의 판단을 무력화시켰다. 위의 행사에서 10년 만에 AI를 다시 만난 이세돌이 자꾸 놀란 것은 AI가 수를 두는 ‘속도’였다. 알파고 대국 때는 수를 두는 제한시간이 2시간이어서 사람에게도 AI에도 ‘장고’라는 개념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이세돌이 흑돌을 놓자마자 바로 백돌이 떨어졌다. 그는 “솔직히 지금 엄청나게 장고를 해도 자신이 없다”고 했다.
AI의 속도는 인간이 사고 과정에 들이는 시간을 얼핏 보잘것없게 만든다. 하지만 이세돌이 장난스럽게 ‘신’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한낱 인간이 ‘속도의 신’ AI에 기죽을 필요는 없다. 이 신에게 명령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명령권자인 인간에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에 대한 고민이며, 좋은 고민에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 이세돌이 초라하게 느낀 ‘장고’야말로 인간에게 남은 가장 인간적인 강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