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재계 인사의 열쇳말로는 ‘안정’이 꼽힌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방산, 조선, 태양광, 유통 등 여러 산업의 업황이 초호황 구간에 진입했거나 회복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철강, 화학 등의 업종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주요 대기업들의 실적이 우상향하고 있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SK그룹도 지난해와 달리 올해 인사에서는 변화의 폭을 최소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SK그룹은 지난해 사장단의 변화를 크게 가져간 데다 그룹 차원의 목표였던 리밸런싱(자산 재조정)도 순항하고 있다.
이 가운데 최근 꾸준히 거론됐던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의 부회장 승진이 올해 SK그룹 인사에서 주요 관전포인트로 떠올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서든데스(돌연사)’를 언급했던 2023년 말부터 곽 사장은 SK하이닉스를 홀로 이끌었고 이후 SK하이닉스는 영업손실을 보던 기업에서 영업이익 수백조 원을 바라보는 반도체 공룡으로 성장했다. 이에 곽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해 고대역폭메모리(HBM) 성공신화를 이어가는 데 더욱 힘을 실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이 9월8일 경기 이천시 이천캠퍼스 수펙스센터에서 열린 '2026 SK하이닉스 미래포럼'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모습. ⓒSK하이닉스
21일 재계 안팎에 따르면 최 회장이 올해 인사에서 변화보다 안정을 추구할 것으로 예상되는 배경에는 그룹 차원의 리밸런싱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점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SK그룹은 2024년부터 비주력 자산을 매각하고 에너지와 배터리를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하는 리밸런싱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3년가량이 지난 현재 SK그룹은 리밸런싱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총차입금에서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을 뺀 SK그룹의 순차입금은 2023년 말 84조 원에 이르렀는데 2026년 상반기 말 기준으로는 현금성 자산이 차입금을 12조 원 웃도는 순현금 구조로 전환했다. 같은 기간 SK그룹은 계열사 수를 716개에서 524개로 줄이면서 ‘군살빼기’를 실행에 옮겼다.
최 회장이 지난해 ‘신상필벌’에 방점을 찍으며 대규모 인사를 진행한 것도 올해 인사에서 변화의 폭을 줄일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SK그룹은 지난해 10월 이형희 SK수펙스추구협의회 커뮤니케이션위원장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키는 등 12명의 사장단 인사를 단행했다.
이에 재계의 시선은 SK그룹 인사에서 올해도 부회장 승진자가 배출될지에 쏠린다.
지난해 이 부회장은 SK그룹에서 2021년 4년 만에 나온 부회장 승진자다. 2023년 말 당시 조대식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김준 SK이노베이션 대표이사, 박정호 SK하이닉스 대표이사 등 잔뼈 굵은 전문경영인 부회장 3인이 동시에 물러난 이후 다시 부회장단이 강화되는 기조를 보인 것이다.
올해 SK그룹에서는 SK하이닉스의 곽 사장이 부회장 승진 1순위 후보로 꼽힌다. 올해 곽 사장이 승진한다면 2020년 말 인사를 통해 사장에 오른 지 5년 만이다. 곽 사장은 지난해 3년 임기의 SK하이닉스 사내이사로 재선임됐다. 임기가 남은 만큼 부회장 승진은 곽 사장의 리더십에 힘을 실어주는 셈이다.
재계에서는 SK하이닉스의 실적 성적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부회장 승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곽 사장은 박정호 전 부회장이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은 2023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단독 대표로 SK하이닉스를 이끌어왔는데 SK하이닉스는 곽 사장 단독 체제에서 괄목할 만한 실적 성장을 이뤄냈다.
SK하이닉스는 2023년 연결기준으로 영업손실 7조7303억 원을 냈다. 그러나 곧바로 이듬해 흑자전환에 성공했고 증권업계의 올해 평균 영업이익 전망치는 263조 원, 내년 전망치는 404조 원에 이른다.
SK하이닉스가 최근 3년 동안 보여준 실적 성장은 시점이나 내용 측면에서 곽 사장의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에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곽 사장이 SK하이닉스 단독 대표에 올라서기 직전인 2023년 10월 최 회장은 리더들에게 위기의식 속에서 생존을 위한 분발을 촉구했다. 최 회장은 당시 ‘2023년 CEO 세미나’에서 2016년 이후 7년 만에 ‘서든데스’라는 열쇳말을 꺼내 들며 변화 없이는 생존도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SK하이닉스의 최근 호실적은 인공지능(AI) 시대가 불러온 메모리반도체 초호황의 영향이 컸지만 이 흐름에 올라탈 수 있었던 것은 곽 사장이 다져온 HBM 경쟁력이 근간에 위치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곽 사장의 향후 부회장 승진은 최 회장이 SK하이닉스의 HBM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하고 다음 단계의 성장판도 열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된다.
2023년 말 SK하이닉스는 HBM 사업에 ‘올인’하는 대규모 조직개편을 단행했고 곽 사장은 HBM을 SK하이닉스의 핵심으로 성장시켰다.
SK하이닉스는 그해 미래 AI 인프라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유지한다는 목표로 ‘AI 인프라’ 조직을 신설했다. 또 산하에 부문별로 흩어져 있던 HBM 관련 역량과 기능을 결집한 ‘HBM 비즈니스’ 조직을 새로 꾸렸다.
SK그룹은 10월 안에 사장단 인사를 실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까지 12월에 이뤄지던 사장단 인사를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10월로 앞당기는 것이다. 올해 11월 중순 예정된 CEO 세미나에 앞서 각 계열사의 리더십을 확정하고 본격적으로 내년 경영전략을 세울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