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AI 생태계의 판도를 흔들 동맹이 성사됐다. 네이버가 세계 최대 AI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를 핵심 주주로 맞이하며, 단순한 기술 제휴나 수요-공급의 테두리를 넘어선 공동 운명체로 거듭났다.
엔비디아가 국내 삼성·SK 등의 하드웨어 공급자가 아닌 네이버의 손을 잡은 것은, 네이버가 가진 AI 인프라와 자체 모델, 서비스 운영까지 아우르는 종합적 '풀스택' 역량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번 결합이 AI 인프라 구축이 끝난 뒤에도 GPU 수요를 계속 확보해야 하는 엔비디아와, 포털 이후의 성장 동력과 이를 감당할 자본이 필요한 네이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네이버가 세계 최대 AI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를 핵심 주주로 맞이하며, 단순한 기술 제휴나 수요-공급의 테두리를 넘어선 공동 운명체로 거듭났다. 사진은 7월24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엔비디아 사옥에서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과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1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투자 계약을 체결한 후 악수하는 모습. ⓒ네이버
네이버는 엔비디아로부터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통해 1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투자를 체결하고, 90억 달러 규모의 GPU 인프라 및 데이터센터 확보를 위해 글로벌 투자사 브룩필드를 독점적 우선 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고 7월27일 밝혔다.
이날 발표된 딜은 단순한 사업 제휴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엔비디아는 10억 달러(약 1조4809억 원)를 투입해 네이버 지분 4.5%(보통주 724만1564주)를 취득하게 되며, 이는 창업자인 이해진 이사회 의장의 지분(3.91%)을 웃도는 규모다.
네이버가 3자 배정 유상증자에 나선 것은 2008년 코스피 이전 상장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여기에 브룩필드가 조달하는 90억 달러까지 더해 네이버는 총 100억 달러에 달하는 'AI 팩토리' 프로젝트의 닻을 올렸다.
네이버와 엔비디아의 계약이 주목받는 이유는 금액이 아니라 성격에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분을 취득한 한국 기업은 네이버가 유일하다. 엔비디아와 SK그룹의 협력 규모는 최소 1천억 달러로 네이버(총 100억 달러)의 10배에 달하고 삼성전자·현대차도 대규모 GPU 협력을 맺었지만, 모두 수요-공급자 관계의 사업적 계약에 그친다. 주주명부에 엔비디아의 이름을 올린 한국 기업은 네이버뿐이다.
계약은 7월24일(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K-AI 서밋'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체결됐다.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은 최수연 대표가 아니라 이해진 의장이었다. '은둔의 경영자'가 대통령과 글로벌 AI 리더들 앞에 직접 나선 것이다.
엔비디아가 삼성이나 SK가 아닌 네이버를 택한 이유로 먼저 언급되는 것은 풀스택 역량이다. 네이버가 AI 인프라부터 모델, 서비스까지 전 영역을 직접 운영해본 희귀한 기업이라는 것이다. 네이버는 2019년 엔비디아의 슈퍼컴퓨팅 인프라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고, 현재 국내 최대인 10만 장 수준의 GPU 클러스터를 운영하는 국내 유일의 대규모 GPUaaS(서비스형 GPU) 사업자다.
협력 발표 직후 증권업계에서도 젠슨 황 CEO 선택의 배경을 짚는 분석이 잇따랐다. 메리츠증권은 이날 보고서에서 엔비디아가 네이버를 선택한 이유로 "소프트웨어 피드백을 확보하며 산업 내 우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바라봤다. 같은 날 김동우 교보증권 연구원은 "네이버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에서의 AI 컴퓨팅 수요를 확인하고 AI 팩토리 사업을 개시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엔비디아의 사정이 겹친다. 칩 공급자의 숙명은 인프라가 다 깔리면 수요가 멈춘다는 것이다. 엔비디아가 세계 곳곳의 AI 인프라 기업에 지분 투자를 병행해온 것은 미래의 GPU 수요를 스스로 설계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메모리를 공급하는 삼성·SK와의 일차원적 관계와 달리, 검색·커머스·클라우드에서 모델과 서비스까지 직접 굴리는 네이버는 GPU를 사는 고객을 넘어, GPU를 쓸 이유를 만들어내는 존재다. 하드웨어 강국에서 굳이 소프트웨어(서비스) 기업을 찾아 지분까지 취득한 이유다. 엔비디아가 산 것은 네이버의 주식이 아니라 미래 수요의 지분인 셈이다.
결국 이번 딜은 이해진과 젠슨 황, 두 창업자의 '넥스트'가 만난 결과로 풀이된다. 젠슨 황 CEO에게는 칩이 다 팔린 뒤에도 수요를 만들어줄 파트너가 필요했고, 이해진 의장에게는 포털 너머의 성장 동력과 이를 감당할 자본이 필요했다.
이해진 의장의 준비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17년 3월 이사회 의장직에서, 2018년 3월 등기이사직에서 차례로 물러난 뒤 글로벌투자책임자(GIO)라는 직함으로 유럽과 일본을 오갔다. 잠적처럼 보였던 이 7년은 이번 딜을 가능하게 한 개인적 배경이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담판해 라인-야후재팬 경영통합을 성사시키고 합작 지주사 A홀딩스를 만든 것은 그가 글로벌 빅딜을 직접 소싱한 전례다.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이어진 투자, 포시마크·왈라팝 인수까지, GIO 시절의 행보는 모두 네이버의 미래를 찾는 과정과 결이 닿아 있다.
2025년 3월 7년 만에 경영에 복귀한 이 의장은 주주총회 직후 "엔비디아 등과 협력모델을 지금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년4개월 뒤, 젠슨 황 CEO와 이해진 의장이 공동운명체가 되는 계약에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