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에서 배터리의 가격과 성능뿐 아니라 사이버보안 인증이 새로운 경쟁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 정부가 내년부터 전력망에 연결되는 주요 제어장비에 보안 인증을 요구하기로 하면서,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을 공략해 온 중국 업체들이 새로운 진입 장벽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가 중국 업체보다 가격은 비싸지만 일본 업체보다는 저렴한 한국과 대만 기업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SDI는 2030년까지 일본 ESS 판매량을 올해 예상치의 10배인 2GWh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다만 중국 업체들도 인증 요건에 맞춰 제품 구성을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어, 인증 확보가 곧 시장 점유율 확대로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한다.
삼성SDI 직원 2명이 2026년 9월29일 싱가포르에서 개막한 '데이터센터 월드 아시아(DCWA) 2026'에 참가해 원통형·각형 LFP 배터리를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닛케이아시아는 15일 "대만과 한국의 배터리 공급업체들이 중국 경쟁업체들의 일본 내 인증 미획득을 기회로 삼아 일본의 대규모 에너지 저장 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올해 7월 송전망에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 기기에 대해 2027년 4월부터 '일본 사이버 보안 신뢰성 평가(JC-STAR)' 인증을 의무화하기로 했다. 인증 대상에는 재생에너지 저장 시설의 배터리 제어 시스템과 태양광 발전소의 전력변환장치 등이 포함된다.
JC-STAR는 일본 경제산업성 산하 정보처리추진기구(IPA)가 운영하는 사물인터넷(IoT) 제품 보안 적합성 평가·표시 제도다. 현재까지 에너지 저장 시스템 분야에서는 일본·미국·독일·한국·대만 기업 등 약 50개 기업이 인증을 획득했다. 그러나 일본 시장에서 상당한 점유율을 차지하는 화웨이 테크놀로지, 선그로우, BYD 등 중국 기업은 인증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닛케이아시아는 "일본 정부는 중국 기업들이 인증을 획득하지 못한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며 "다만 국가 안보 문제가 주요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이어 중국 기업들이 인증을 획득하지 못할 경우 일본 내 사업 규모를 축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한국과 대만 기업들은 이 틈을 활용해 일본 시장 공략을 확대하고 있다.
삼성SDI는 2025년 JC-STAR 인증을 획득했다.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삼성SDI는 2030년까지 일본 내 에너지 저장 시스템 판매량을 2GWh로 늘릴 계획이다. 이는 2026년 예상 판매량의 10배에 해당한다. 삼성SDI는 중국 업체에서 제품을 공급받던 고객을 자사 제품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해 수요를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JC-STAR 인증을 8월에 획득한 대만 기업 장경국제에너지(브랜드 명 콜드일렉트릭)은 앞서 3월, 자사 제품을 활용해 연말까지 일본 최초의 에너지 저장 시설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회사는 일본 배터리 유통업체 유아사M&B와 협력해 판매를 확대하고 있다. 또한 2028년까지 대만 공장의 생산 능력을 현재의 9배인 3GWh로 늘릴 계획이다.
일본은 세계 5위의 전력 소비국으로, 최근 친환경 에너지 설비 확충에 나서고 있다. 일본 컨설팅 업체 RTS는 닛케이아시아에 일본이 2040년까지 100GWh 규모의 에너지 저장 시설을 운영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현재 규모의 9배에 해당한다.
에너지 저장 시설 확충이 예상되는 배경에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증가에 따른 전력 수요 확대가 있다.
한국과 대만 업체들은 대량 생산을 통한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일본 업체보다 가격 경쟁력에서 앞서고 있다. 삼성SDI 관계자는 닛케이아시아에 "삼성SDI 배터리는 중국 업체 제품보다 20~30% 비싸지만, 일본 업체 제품보다는 20~30% 저렴하다"고 말했다.
JC-STAR 인증은 통신 기능이 없는 배터리 셀이나 기타 부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닛케이아시아는 중국 업체와 거래하는 관계자를 인용해 중국 제조업체들이 통신 부품을 제외한 에너지 저장 시스템을 일본 시장에 판매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관계자는 중국 업체들이 통신 관련 부품의 생산을 일본 기업에 맡기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