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과 포용’을 내세워 신설한 ‘아시안 팝’ 부문이 오히려 음악을 국적과 지역으로 구분하는 새로운 경계가 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방탄소년단. ⓒAFP/연합뉴스
K-팝 아이돌을 넘어 세계적 그룹으로 성장한 방탄소년단(BTS)은 그래미에 등을 돌렸다. BTS 멤버 전원은 지난 29일 각자의 인스타그램에 “저희는 올해 그래미에 출품하지 않기로 했다”며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래미가 새롭게 만든 ‘아시안 팝’ 부문을 겨냥한 사실상의 보이콧 선언으로 읽혔다.
BTS의 보이콧 선언에 글로벌 팬덤 아미도 응답했다. 팬들은 BTS의 ‘에일리언스(Aliens)’를 집중적으로 스트리밍하며 곡을 다시 차트 위로 끌어올렸다. BTS 정규 5집 ‘ARIRANG’ 수록곡인 ‘에일리언스’는 30일 전 세계 아이튠즈 톱 송 1위를 기록했다.
이 곡은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인과 이민자를 ‘외부인’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뒤집어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하는 곡으로 해석된다. 가사에 등장하는 “From the 가 나 to the 하”는 한국어 자음 ㄱ부터 ㅎ까지를 영어의 ‘A to Z’처럼 표현한 것으로, 한국어와 한국적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파든(Pardon, 실례지만) 김구 선생님 텔 미 하우 유 필(tell me how you feel, 기분이 어떤지 말해주세요)” - 방탄소년단 '에일리언스' 가사 중
RM의 랩 파트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언급하는 대목도 담겼다. 이 곡은 BTS가 한국의 언어와 역사, 정체성을 감추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음악적 자산으로 내세운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아시안 팝’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이기를 거부한 BTS의 이번 보이콧의 취지와도 맞닿아 있다.
BTS의 결정에는 동료 음악인들도 힘을 보탰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연출한 매기 강 감독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BTS의 보이콧 기사를 인용하며 손뼉 치는 이모티콘과 함께 지지의 뜻을 보냈다. 에픽하이의 타블로 역시 RM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재게시하며 “아리랑 >그래미”(그래미보다 아리랑이 크다)라는 문구로 응원을 더했다.
BTS와 그래미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장면도 나왔다. 31일 기준 그래미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BTS의 '다이너마이트(Dynamite)'와 '버터(Butter)' 공연 영상을 찾아볼 수 없다. 영상이 사라진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다.
방탄소년단(BTS) 멤버들이 2026년 7월19일 미국 뉴저지주 이스트 러더퍼드의 뉴욕·뉴저지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월드컵 축구대회 스페인과 아르헨티나의 결승전에서 공연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논란은 그래미가 지난달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을 신설하겠다면서 촉발됐다. 한국·중국·일본 등 아시아권에서 나온 팝 음악을 하나의 별도 범주로 묶는 부문이다.
그래미는 아시아 음악을 더 폭넓게 조명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레딧 등 해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아시안 팝’ 부문 신설을 두고 “인정으로 포장된 분리”라는 비판이 나왔다. BTS가 ‘아시아 아티스트’라는 이름으로 먼저 규정되기보다 아티스트 그 자체로 평가받기를 원한다는 점에 공감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논란이 커지자 그래미는 곧바로 진화에 나섰다. 하비 메이슨 주니어 그래미 CEO는 30일 공식 SNS에 입장문을 올리고 “소식을 듣고 슬펐지만, 음악 창작가로서 그들의 결정을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해명을 하고 싶다”며 신설 부문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는 “아시안 팝 부문은 아시아에서 나오고 있는 팝 예술의 깊이와 다양성, 탁월성을 기리기 위해 신설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중요한 아티스트들을 특별히 조명하기 위한 것이며 결코 구분 지으려는 것이 아니다”며 “1만5000명의 그래미 투표인단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대상을 넓히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래미를 둘러싼 ‘포용과 배제’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미 어워즈는 오래전부터 ‘백인 중심’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흑인과 여성 등 비주류 음악인에 대한 인정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이어졌고, 주요 부문에서 백인·주류 음악에 유리한 투표 구조와 편견이 작동한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그래미가 2018년부터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에 나선 배경이기도 하다.
그래미가 음악의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 카테고리를 세분화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그 기준이다. 왜 미국과 영국의 음악은 장르와 음악적 특성에 따라 세분화하면서, 한국 음악은 굳이 ‘아시아’라는 이름 아래 묶어야 할까.
한국·일본·중국의 음악은 서로 다른 역사와 언어, 문화, 산업적 배경을 갖고 있다. K-팝과 J-팝, C-팝 역시 서로 다른 음악적 문법과 산업 구조를 갖는다. 그런데 해외 음악에는 적용하지 않는 ‘대륙 단위의 분류’를 아시아 음악에만 적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BTS의 이번 보이콧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BTS는 그래미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아시아 아티스트 가운데 하나다. BTS는 2019년부터 7년간 그래미 정식 투표 회원으로 활동해왔다. 2019년 그래미 어워즈에서 시상자로 무대에 올랐고 직접 공연도 펼쳤다. 이후 2021년부터 3년 연속 그래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끝내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는 못했다.
처음 그래미 후보에 올랐을 때 BTS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K-팝 최초라는 기록에 벅차했고, 그래미 무대와 트로피를 꿈꿨다. 그러나 7년 뒤 BTS는 그 무대를 향해 다시 손을 내미는 대신, ‘아시안 팝’이라는 이름 앞에서 스스로 발걸음을 돌렸다. 트로피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어떤 범주에 놓일 것인지에 대한 선택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