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계와 정치권을 둘러싼 경제 이슈를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대부분 성과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상법 개정 논의는 주주의 권리를 어디까지 확대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다. 배당 확대와 자사주 소각 요구는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을 주주에게 얼마나 돌려줄 것인지에 관한 논쟁이다. 이른바 ‘영업이익 N%’로 대표되는 기업의 성과급 논란은 이익의 어느 정도를 노동자와 공유할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이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초호황’을 맞이해 연간 수백조 원의 영업이익을 거둘 것이라는 전망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이에 따라 주가도 이제까지는 없었던 수치를 나타내면서 분배를 향한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온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시작된 성과급 분배 논의는 카카오, HD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으로 퍼져가고 있다.
기존 기업들의 미래 성장동력과 새로운 초격차 기업의 탄생을 위해서는 분배 만큼이나 성장을 향한 고민이 이어져야 한다. AI 이미지
이러한 논의 자체가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다. 성장의 과실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중요한 과제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주주권 강화 역시 자본시장의 선진화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문제는 균형이다. 노동자의 몫과 주주의 몫을 둘러싼 논쟁은 넘쳐나지만, 10년 뒤 한국 경제를 책임질 새로운 산업과 기업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한국 사회의 경제 담론은 분배의 영역에 집중된 반면 AI 시대 한국 경제를 이끌 다음 산업과 기업은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는 좀처럼 중심에 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분배는 성장의 결과물이다. 성장이 없다면 나눌 몫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성과급 논란의 중심에 있는 반도체 산업만 봐도 그렇다. 오늘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거두고 있는 수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년간 이어진 대규모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반복된 업황 침체를 견뎌낸 결과다. 최근 AI 시대의 핵심 부품으로 떠오른 고대역폭메모리(HBM) 역시 장기간 축적된 기술력과 선행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한국 경제가 처한 구조적 환경이다. 미국과 중국은 이미 한국과 비교하기 어려운 규모의 경제를 구축하고 있다. 한국 경제가 지금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시장 규모가 아니라 새로운 산업을 선제적으로 육성하며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반도체와 조선, 자동차가 그랬다. 한국은 산업 구조가 변화할 때마다 새로운 주력 산업을 발굴하며 성장해왔다. 자원이 부족하고 내수 시장이 크지 않은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결국 새로운 기회를 찾아 산업으로 키워내는 능력에 있다.
물론 성장과 분배는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은 공정한 분배를 통해 사회적 지지를 얻을 수 있고, 공정한 분배 역시 성장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성과급 제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주주 권한을 어디까지 확대할 것인지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떤 산업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인지, 기업들이 어떤 분야에 투자해야 할 것인지, 국가가 어떤 경쟁력을 갖춰야 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다.
오늘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과거의 투자와 도전이 만든 결과다. 이제 필요한 것은 10년 뒤 삼성전자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고민하는 일이다. 동시에 지금의 SK하이닉스와 같은 성공 사례를 또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지를 향한 질문도 던져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둘러싼 우호적 환경은 예상보다 더 길어지고 있다. AI 확산에 따른 메모리 수요 급증으로 HBM을 비롯한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은 최근 2030년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산업계도, 증권가도, 주주들도 이러한 전망에 환호하고 있따.
하지만 여기서 한 번쯤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으로 몇 년 더 이어질 메모리 호황을 즐기는 데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기간 또 다른 SK하이닉스를 준비할 것인가.
미래의 성장을 만드는 논의보다 성장의 결과를 나누는 논쟁이 더 커지는 순간, 한국 경제가 나눌 수 있는 ‘파이’의 확장은 불확실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의 과실을 어떻게 나눌 것이냐는 고민만이 아니라 미래의 산업과 기업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절박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