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총칼을 앞세운 '독재자'가 유효하지 않은 2026년의 한국 사회에서도 이 서늘한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의 국가와 사회 역시 1900년대의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라며 전체주의로 이끄는 달콤한 사탕을 끊임없이 건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달콤한 전체주의의 유혹이 가장 날카로운 폭력으로 둔갑하는 곳이 있다. 바로 자본주의의 가장 건조한 전장, 기업의 '노사 갈등' 한복판이다.
21일 서울 용산구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자택 인근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삼성전자 주주행동 실천본부 관계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파업 직전까지 치달았던 삼성전자 노사의 성과급 협상이 바로 그 무대였다. 협상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영업이익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둘러싼 냉정한 숫자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협상이 격화되자 테이블 밖에서는 전혀 다른 언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최대 100조 원대 기업 이윤의 손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위기. 심지어 코스피가 8천에 임박하고 1만을 향해 가려는 상황에서 정부와 정치권마저 나서 '국익'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담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거대한 명분이 등장했고, 파업을 예고한 노조를 향해 여론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여기서 이번 사태의 본질이 정말 '국익'인가에 대해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회사(경영진), 주주, 노동조합은 모두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파이를 극대화하려는 이익집단이다. 여기에 선악이나 도덕이 개입할 이유는 없다. 주주가 배당을 요구할 때는 자본주의의 정당한 권리라 부르면서, 왜 노동자가 이익을 요구하는 순간 '국가 경제를 멍들게 하는 이기주의'라는 도덕적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가.
주주와 회사 측, 그리고 그들에게 동조하는 여론은 ‘노동자들은 불황의 리스크는 부담하지 않으면서 호황의 이익 공유만 외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 논리는 절반만 진실이다. 노동자들은 경영이 악화될 때 ‘고용의 위기’라는, 삶 전체를 뒤흔드는 가장 직접적 리스크를 온몸으로 감당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결국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리스크를 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익이 났을 때 그 파이를 누가 얼마나 가져가느냐를 두고 건조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대립은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작동하는 한, 자본주의의 매우 건전한 작동 방식 가운데 하나다. 노조가 법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쟁의권을 행사한다면, 그들은 시스템이 부여한 권리를 행사하는 합리적 플레이어일 뿐이다. 이 차가운 비즈니스의 룰에 '애국심'이나 '도덕적 당위'가 난입하는 순간 합리적 타협의 장은 무너진다.
물론 삼성전자가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큰 만큼, 장기 파업이 몰고 올 파장에 대한 대중의 불안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쟁의가 사회경제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는 것 자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논의와, 여론이 들끓으며 “일반 노동자들보다 훨씬 돈도 많이 버는 '귀족 노조'가 국익을 앞에 두고 조금의 희생도 감내하지 않으려 한다”라며 노조를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언뜻 당연한 것처럼 들리는 이 말에는 매우 교묘한 ‘전체주의’의 논리가 숨어있다. 이미 많이 받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정당한 몫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논리, 그리고 '국가를 위해'라는 명분 앞에서 노동자는 이익집단이 아닌 희생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요다.
“국가적 이익을 위해 희생하라”는 프레임은 결국 한쪽 집단을 국가에 반역하는 '악마'로 규정하게 만든다. 서로의 힘과 논리로 타협해야 할 비즈니스 협상 테이블에 '애국심'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당위가 개입하는 순간, 여론은 한 이익집단을 대리하여 다른 이익집단을 억압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다시 카뮈의 말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전체의 이익'을 알리바이 삼아 누군가의 합법적 권리를 짓누르는 독재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 독재자는 권력자가 아니라, 선의로 무장한 '다수의 여론' 그 자체다. 영국의 사상가 C.S. 루이스는 에세이 '인도주의적 처벌 이론'에서 국가가 '당신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가하는 폭력이 왜 가장 끈질긴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탐욕스러운 악인의 잔인함은 때로 잠들기도 하고 어느 순간 충족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은, 자신들의 양심의 승인을 받기 때문에 끝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일상에서는 아주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일지라도, '이것이 국가 경제를 위하는 길'이라는 숭고한 명분 앞에서는 너무도 쉽게 누군가의 권리를 짓누르는 폭력에 동조하게 된다.
스스로를 애국자이자 공동체의 수호자라 믿는 다수의 양심은, 타인의 정당한 이익 추구를 마녀 사냥하면서도 한 치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빠질 수 있는 ‘전체주의의 함정’이다.
노사 갈등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차갑고 건조한 자본주의의 룰북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섣부른 애국심과 당위가 협상 테이블에 난입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권리를 짓누르는 여론의 일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