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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야생동물의 생태가 아름다우면서도 비정함을 느낀다. 헌신적인 모성애도 있지만, 새끼를 키울 수 없는 환경에서 어미가 번식과 육아를 포기하는 선택 역시 자연의 엄연한 단면이다. 어쩌면 인간만이 이를 비정하다고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때로는 인간도 특별한 것 없는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걸 느낀다.

낙태를 상징하는 일러스트.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를 재편집 한 것.
낙태를 상징하는 일러스트.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를 재편집 한 것.

대학병원에서 근무할 적에 간혹 임신 중절에 대한 상담을 요청받는 일이 있었다. 임신이 산모의 건강에 심각한 해가 된다든지, 태아가 생존하기 어려운 불가피한 의학적 이유라면 문제 될 건 없다. 그러나 그저 키울 형편이 되지 못해 임신 중절을 요청하는 경우는 매우 난감했다. 당시엔 예외 사항에 해당하지 않은 임신 중절은 불법이었으며, 요청한 환자와 시술한 의사 모두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낙태죄’이다.
 
‘임신 중절을 왜 대학병원까지 와서 요청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환자 본인도 임신인 줄 몰랐기 때문에 응급실 같은 다른 과에서 우연히 확인되어 산부인과로 의뢰받아서 온다. 당연하지만 대학병원은 시술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담하는데 부담이 된다든가 고민할 게 전혀 없었다. 
 
“안 됩니다.”
 
라고 거부하면 그만이었다. 사정은 딱하지만, 의사가 형사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해준다고 환자가 고마워하지도 않는 음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선배 의사의 경험담도 있었다.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제발 살려달라 사정해서 임신 중절을 해줬더니, 다음 날 난데없이 남자 친구라는 사람이 와서 의사를 낙태죄로 신고하겠다고 돈을 계속 요구하는 협박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선배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강도로 돌변하는 경험을 한번 하면, 다음부턴 그냥 안 해주는 게 상책이라는 교훈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선배의 피 같은 조언을 듣고 나도 그런 봉변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날도 마찬가지로 환자분에게 임신 중절은 안 된다고 설명했다. 환자는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와 같이 상담받았다. 진중한 느낌이나, 어쩌면 사무적인 책임 회피 같은 설명을 듣고 어머니는 답답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니,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면 뭐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딸이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냥 형벌처럼 낳으라는 말밖에 안 되지 않나요? 저도 종교가 있는 사람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몰라서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아직 애를 낳아 키울 상황이 아니고, 딸의 인생도 중요한 문제이지 않습니까? 어떤 집은 일찍 결혼시키거나 어쩔 수 없으면 입양을 보내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형편이 안 되면 다른 선택지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심지어 아직 임신 초기인데요!”

어머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필자도 그 문제가 항상 고민이었다. '생명윤리'라는 강력한 명분이 있기에 임신 중절을 반대하는 건 매우 쉽다. 그러나, 어쩌면 우린 당사자인 여성을 비윤리적인 인간이라고 너무나 쉽게 비난하는 게 아닐까. 도덕적 우월감마저 느끼면서 말이다. 그리곤 뒷일은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그런다고 임신 중절이 사라지고 모든 아이가 다 출생할 거라 기대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대놓고 말할 순 없지만, 누군가는 여성이 위험한 환경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남들이 기피하는 일을 한다는 의미이다.

상담한 환자에게도 “아마도 동네 산부인과 의원 중엔 원하시는 상담을 해줄 수 있는 곳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안내해 드렸다. ‘오늘 난 다른 선생님께 책임을 떠넘겼지만, 언젠가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을 짊어지게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세월이 흐르니 영원할 것 같던 금기도 변한다.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임신 중절은 점차 비범죄화 경향으로 가는 추세다. 이는 태아의 생명권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낙태를 범죄로 처벌해 봤지만, 실효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험한 불법 낙태와 이를 빌미로 하는 협박 범죄 등 부작용만 발생했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크다.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된 결과,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해서 헌법 불합치 판결을 하였다. '위헌'이 아니라 '헌법 불합치'라는 것이 중요하다.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완전히 허용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낙태법이 합헌적인 요소와 위헌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있으니 개정(기존 조항을 중단하고 입법 촉구)하라는 판결이다.

기존 낙태법은 태아의 생명권만을 중시하여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완전히 무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관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고려하여 '결정가능기간'을 두고 그 기간 내에서는 여성이 전인격적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은 그녀의 삶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일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한국 사회가 마침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논의할 만큼 성숙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다. 낙태법이 1953년에 제정되었으니 무려 66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변화이다.

글쓴이 허지만 산부인과 전문의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안산병원에서 산모입원 전담 임상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미래아이산부인과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임신부터 출산까지 따라가며 시기마다 여성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자 한다. 아울러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느낀 생각과 도덕적 딜레마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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